Operation Perch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에서 6월 7일부터 14일 사이에 벌어진 영국군의 공세작전이다. 작전의 의도는 독일군이 점유하던 연합군의 북서유럽 진공 초기 단계의 주요 목표인 캉Caen을 포위하여 함락시키는 것이었으나 독일군의 격렬한 저항과 영국군의 미숙한 작전 전개 능력이 맞물려 목표를 달성하기 전에 중지되었다.
Operation Perch는 원래 영국군 제30군단이 해안에 상륙하자마자 캉의 남동쪽으로 진격하려는 의도의 작전이었다. 이 작전을 통해 캉의 조기 해방을 노렸으나 진공 사흘 뒤에도 캉이 여전히 독일군의 손에 있었기 때문에 그 목표가 바뀌어 제1군단을 포함하여 캉을 탈취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양익포위로 확대되었다. 다음날 양익포위의 서쪽 날개를 형성하게 된 제30군단은 해방되기 전까지 몇 번이나 주인을 바꾼 틸리 쉬르 쇨르Tilly sur Seulles 주변에서 독일군과의 격렬한 전투에 말려들기 전까지 남쪽으로 진격해갔다. 반면 D-Day 당일 Operation Tonga의 일환으로 낙하한 영국 공정부대가 확보한 오르느Orne 교두보에서 이틀뒤에 발진한 영국군 제1군단의 공세는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과 지속적인 역공에 마주쳐 거의 진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상자의 증대에 더해 독일군의 붕괴가 곧 닥칠 것이라는 어떤 징후도 없었기 때문에 캉 동쪽으로의 진격은 6월 13일에 중지되었다.
그 사이 서쪽에서 미군의 압력으로 독일군 방어선에 돌파구가 생기자 영국군 지휘부는 틸리 쉬르 쇨르 주변의 전투 임무에서 해제시킨 제7기갑사단을 이 돌파구에 투입, 측익 기동을 실시하여 독일군의 후퇴를 강요하려 한다. 하지만 돌파구를 통해 우회기동하던 영국군 제7기갑사단은 얼마 못가 독일군의 반격에 직면, 빌레 보카즈Villers-Bocage 전투를 포함한 이틀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후퇴했다. 이후 영국군은 제7기갑사단을 보강, 다시 한 번 공세 재개를 시도할 예정이었지만 영국 해협의 강력한 폭풍으로 인해 연합군의 병참선이 심각하게 붕괴되면서 작전도 최종적으로 중지되었다.
돌파구를 만들자마자 곧바로 전투로 확대시킨 영국군의 선택은 여전히 논쟁의 주제가 되어 왔다. 역사가들은 영국의 사단 및 군단 수준의 실패 때문에 캉의 조기 탈취 기회를 무산시켰다는 데엔 동의한다. 하지만 독일군이 공세에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기갑예비를 엄청난 손실을 초래하는 방어 역할에 투입시킴으로서 역공에 나설 역량을 소진시켰다는 관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현재 여기 공개된 것은 Operation Perch에 대한 개괄입니다. 이후 글은 톰과제리 내의 Northwest Europe Theater 게시판에 지속적으로 업데이트 되어 게재됩니다. 이곳의 전문 공개는 개한 및 엔하 윅히라는 집단지성-펌-질에 대한 대비책으로서 앞으로 6개월에서 1년 정도의 embago term을 거친 뒤에나 이뤄질 예정입니다. 이에 대한 방문자 여러분의 많은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Operation Perch (2)로 이어집니다.
Operation Perch는 원래 영국군 제30군단이 해안에 상륙하자마자 캉의 남동쪽으로 진격하려는 의도의 작전이었다. 이 작전을 통해 캉의 조기 해방을 노렸으나 진공 사흘 뒤에도 캉이 여전히 독일군의 손에 있었기 때문에 그 목표가 바뀌어 제1군단을 포함하여 캉을 탈취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양익포위로 확대되었다. 다음날 양익포위의 서쪽 날개를 형성하게 된 제30군단은 해방되기 전까지 몇 번이나 주인을 바꾼 틸리 쉬르 쇨르Tilly sur Seulles 주변에서 독일군과의 격렬한 전투에 말려들기 전까지 남쪽으로 진격해갔다. 반면 D-Day 당일 Operation Tonga의 일환으로 낙하한 영국 공정부대가 확보한 오르느Orne 교두보에서 이틀뒤에 발진한 영국군 제1군단의 공세는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과 지속적인 역공에 마주쳐 거의 진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상자의 증대에 더해 독일군의 붕괴가 곧 닥칠 것이라는 어떤 징후도 없었기 때문에 캉 동쪽으로의 진격은 6월 13일에 중지되었다.
그 사이 서쪽에서 미군의 압력으로 독일군 방어선에 돌파구가 생기자 영국군 지휘부는 틸리 쉬르 쇨르 주변의 전투 임무에서 해제시킨 제7기갑사단을 이 돌파구에 투입, 측익 기동을 실시하여 독일군의 후퇴를 강요하려 한다. 하지만 돌파구를 통해 우회기동하던 영국군 제7기갑사단은 얼마 못가 독일군의 반격에 직면, 빌레 보카즈Villers-Bocage 전투를 포함한 이틀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후퇴했다. 이후 영국군은 제7기갑사단을 보강, 다시 한 번 공세 재개를 시도할 예정이었지만 영국 해협의 강력한 폭풍으로 인해 연합군의 병참선이 심각하게 붕괴되면서 작전도 최종적으로 중지되었다.
돌파구를 만들자마자 곧바로 전투로 확대시킨 영국군의 선택은 여전히 논쟁의 주제가 되어 왔다. 역사가들은 영국의 사단 및 군단 수준의 실패 때문에 캉의 조기 탈취 기회를 무산시켰다는 데엔 동의한다. 하지만 독일군이 공세에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기갑예비를 엄청난 손실을 초래하는 방어 역할에 투입시킴으로서 역공에 나설 역량을 소진시켰다는 관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현재 여기 공개된 것은 Operation Perch에 대한 개괄입니다. 이후 글은 톰과제리 내의 Northwest Europe Theater 게시판에 지속적으로 업데이트 되어 게재됩니다. 이곳의 전문 공개는 개한 및 엔하 윅히라는 집단지성-펌-질에 대한 대비책으로서 앞으로 6개월에서 1년 정도의 embago term을 거친 뒤에나 이뤄질 예정입니다. 이에 대한 방문자 여러분의 많은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Operation Perch (2)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