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SS기갑군단은 침공에 대응하기 위해 6월 7일 오후 서부기갑집단에서 제7군으로 전속되었다. OB West의 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Gerd von Rundstedt 원수는 게이어 폰 슈베펜부르크Geyr von Schweppenburg 대장에게 6월 10일까지 반격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적시에 부대를 집결시킬 수 없을 것이라며 에르빈 롬멜 Erwin Rommel 원수가 이를 중지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용한 독일군 부대들은 그들의 주둔지를 떠나 연합군이 상륙한 해안을 향해 달려갔다. 제1SS기갑군단은 독일 육군에서 가장 강력한 편제를 가졌다는 판저레어 기갑사단과 무서운 아이들 제12SS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 그리고 일단은 베테랑 제21기갑사단으로 구성된 강력한 부대였다. 샤르트르Chartres를 떠나 90마일을 행군하는 동안 연합군의 항공공격에 노출되어 200대 이상의 차량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판저레어 사단은 제1SS기갑군단에 맞서기 위해 제30군단이 집결중인 틸리 쉬르 쇨르 지역에 6월 9일 밤에 도착했다. 제30군단은 제50보병사단이 성공적으로 진격했지만 제1SS기갑군단 예하 부대와 마주쳤기 때문에 캉 외곽에서 더 이상 진격을 하지 못했다. 이들과 맞선 제1SS기갑군단은 제12SS기갑사단과 제21기갑사단 예하 부대는 제716초계보병사단 잔여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30군단의 공격
제1SS기갑군단이 예하 3개 사단을 집중시킨 대규모 반격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캉 북쪽의 영국-캐나다 해안 교두보에 대해서는 몇 번의 공세가 이뤄졌다. 6월 9일 아침에는 캄프그루페 마이어와 제30차량화여단의 잔여가 바이외 북쪽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공세를 발진시켰다. 이날 늦게 제30군단은 제50 보병사단이 틸리 쉬르 쇨르 북동쪽 인근에 도착하면서 미군과의 지상연결에 성공했을 때 판저레어의 첫 번째 전차들과 조우했다. 이날 저녁 동안 판저레어와 제12SS기갑사단 예하 전차들이 역공에 나섰다. 그들의 역공은 영국군 1개 중대를 괴멸시켰지만 다음날 아침에 중지되었다. 6월 10일 제7기갑사단은 제50보병사단 휘하 제56보병여단을 배속받아 제50보병사단의 전선을 넘어 공격에 나섰다. 이날 밤 사단은 틸리 쉬르 쇨르 북서쪽 외곽에 도달했고 다음날 예하부대들은 시가지로 진입, 중앙 교차로를 확보했다. 하지만 곧이어 판저레어가 발진시킨 몇 번의 역공에 후퇴를 강요당하면서 영국군의 점령은 잠시로 끝났다. 보카즈에 기댄 제50사단의 후속 시도는 판저레어의 만만찮은 저항을 넘지 못하고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6월 11일, B군집단은 영국군 제2군과 맞서던 기갑전력을 대신하여 보병부대를 배치하고 기갑전력을 카렝탕 지역으로 전환시켜 쉘부르에 대한 위협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제2군의 공세가 시작되고 아돌프 히틀러의 반대가 겹치면서 롬멜은 이 기동을 조직화할 수 없었다. 다음날 롬멜은 허가없이는 어떠한 후퇴도 있을 수 없으며, 아울러 오르느 교두보를 시작으로 동쪽에서 서쪽에 펼쳐진 연합군의 상륙거점을 분쇄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받았다.
제1군단의 공격
제30군단이 틸리 쉬르 쇨르의 통제권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를 벌이는 사이 제1군단의 전선은 제51[하이랜드]보병사단과 제4기갑여단의 포진이 지연되면서 6월 12일로 공세일자가 수정되었다. 루드비히 포틴Ludovic Fortin은 이 사건은 제51보병사단의 단독공세였으며 제4기갑여단이 투입된 첫 번째 대규모 공세는 Operation Epsom에서 제50보병사단을 지원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어쨌거나 6월 10일, 기갑부대의 지원을 받은 독일 보병들이 제6공정사단의 낙하산병들이 operation Tonga의 결과로 확보한 뒤 제51보병사단과 제4기갑여단의 도착을 기다리던 오르느 동안 교두보에 대한 반격을 시작했다. 낙하산병들은 해군의 함포 사격의 지원을 받으며 교두보를 고수하는데 성공했고, 반격에 투입되었다가 포로가 된 독일군의 어느 장교는 지난 12시간 동안의 전투에서 자신의 대대가 실제적으로 전멸했다고 말했다. 저녁 무렵 독일군은 랑빌의 탈환을 시도했으나 이 공격도 정지되었고, 역습을 달했다. 공수병들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6월 10일 제51보병사단과 제4기갑여단의 도착까지 오르느강 교두보를 고수하던 제6공수사단에 대한 기갑부대의 지원을 받는 독일보병들의 공격이 이어졌다. 공수부대원들은 함포지원을 받으며 견고히 방어했으며 이날 포로로 잡힌 독일군 장교는 12시간의 전투로 “대대가 완전히 일소되었다.”고 말했다. 이날 저녁 독일군은 랑빌Ranville의 탈환을 시도했으나 심각한 손실에도 불구, 감투정신을 발휘한 공수부대원들의 견고한 방호 앞에 결국 정지되었다. 저녁이 되면서 제51보병사단의 선도부대가 도착했고 다음날 아침에는 브레빌Bréville에 대한 공세에 나섰다. 엄청난 사상자에도 불구하고 사단의 다른 부대들은 투프레빌Touffreville을 장악했다. 6월 11일 오후동안 캐나다군 여왕직할소총병대와 제1경기병대대는 제50보병사단 예하 제69여단의 공격을 돕기 위해 르 메닐 빠뜨히Le Mesnil-Patry를 장악하기 위한 공세-르 메닐 빠뜨히 전투-에 나섰으나 엄청난 피해를 입고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다.
6월 12일, 브레빌 지역에서 오르느 교두보에 대한 보다 많은 독일군의 공세가 시도되었다. 전투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고 사상자 양측 모두 상당했으나 저녁이 되면서 독일군이 후퇴해 버렸다. 이 결정이 영국군에게 수비 지역에 대한 돌파구를 막고 브레빌을 확보하게 해줬다. 공수병연대 제12대대의 공격으로 자정 무렵에 마을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공격에 나섰던 160명중 141명의 사상자를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제51보병사단은 상테 호노린느Sainte Honorine 남쪽을 향한 제21기갑사단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여 전혀 진격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캉 동쪽에 대한 공격은 6월 13일부로 중지되었다.
코몽 갭과 라이트 훅
캉의 포위가 중지된 사이 영국군 제2군과 미 제1군의 접합점이라 할 수 있는 제30군단의 우익에서는 잠재적으로 유리한 상황이 발전하고 있었다. D-Day 이래 영국군과 미군은 제84군단의 예비를 포함한 5개 독일군 전투단을 격파하면서 트레비에흐Trévières-아지Agy 구역엔 이미 난타당한 제352보병사단 뿐이었다. 제352보병사단은 6월 6일 오마하 비치 방어 이래 지속적으로 작전에 참가해왔고 강요된 막중한 손실에 비해 교체는 극히 적었다. 때문에 제352보병사단의 좌익은 미 육군 제1보병사단 및 제2보병사단의 심대한 압박에 노출되어 붕괴되기에 이른다. 진지를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된 제352보병사단은 6울 9일~10일 사이의 밤을 틈타 생로 방면으로 후퇴했고 그 결과 코몽-리반테Caumont-l'Éventé 근처의 독일군 방어선에는 연합군이 “코몽 갭”으로 부르게 될 약 7.5 마일 폭의 돌파구가 형성된다. 이 지역에는 제17SS기갑척탄병사단의 수색대대 뿐이었고, 사단의 주력은 보다 서쪽의 카랑탕 반도에 있던 미군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독일군은 제2기갑사단을 투입하여 이 돌파구를 메울 계획이었으나 사단 주력은 6월 10일에도 여전히 아미앵과 알랭송 사이에 잡혀 있었기 때문에 사단 전력이 도착하려면 사흘이 필요했다. 제47기갑군단의 군단장 한스 프라이헤어 폰 풍크Hans Freiherr von Funck 대장은 전력을 완전히 집결시킬 때 까지는 제2기갑사단의 투입을 꺼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의 수색대대에게 코몽으로 기동하여 고지대를 확보하라는 명령을 보냈다. 더하여 제1SS기갑군단의 군단장 제프 디트리히는 판저레어와 제12SS기갑사단의 개방된 좌익을 커버하기 위해 그의 유일한 예비 전력인 제101SS중전차대대를 양 사단의 후방에 위치시켰다. 보베Beauvais를 떠나 닷새간 달려와 6월 12일에 막 이 지역에 도착한 제101SS중전차대대 제2중대장 미하일 비트만은 영국군과 마찬가지로 빌레 보카즈 Vllers-Bocage 인근의 고지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가용한 티거 5대를 빌레 보카즈의 213 고지 바로 정남쪽에 포진시켰다.
6월 12일 Operation Perch는 수정되었다. 기회가 왔음을 인식한 제30군단의 군단장 제라드 버크널Gerard Bucknall 중장은 조지 어스킨George Erskine 소장이 지휘하던 제7기갑사단에 틸리 쉬르 쇨르 근처의 전투에서 벗어나 독일군 방어선의 돌파구를 통해 빌레-보카즈를 점령하고 판저 레어 사단의 측익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을에서 2.6km 떨어진 고지가 목표였는데 그것을 점령하면 판저 레어의 후방에 있는 고지를 차지함과 동시에 주요 병참선을 끊어 판저레어 사단의 후퇴, 혹은 항복을 강요하고 Operations Fluid를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제7기갑사단의 측익 기동을 지원하기 위해 제50보병사단은 주공 노력을 틸리 쉬르 쇨르 주변의 판저레어를 압박하는 데 쏟아부었다. 동시에 미육군 제5군단의 예하부대들이 전방으로 밀어붙였다. 미 육군 제1보병사단은 코몽의 독일군을 격파하고 고지를 확보하며, 제2보병사단은 생로 방면으로 공격했다.
독일군의 취약성을 완전히 이용하기 위해서는 빠른 작전이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명령에 따라 틸리 쉬르 쇨르로 진격하고 있던 제7기갑사단의 재배치는 느릿느릿 진행되었다. 어스킨 소장과 제22기갑여단의 여단장 힌드Hinde 준장은 1200시에 회의를 소집했다. 힌드 준장은 즉시 돌파구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131보병여단이 작전을 준비함과 동시에 제50보병사단의 후방에 있던 제56보병여단이 제7기갑사단으로 전속되었다. 이제 제131보병여단과 제22기갑여단으로 구성된 제7기갑사단의 선도부대가 출발했다. 제8왕립아이리쉬경기병연대King's Royal Irish Hussars - 제7기갑사단의 기갑수색연대 -가 여단의 진격로를 정찰하기 시작하고, 사단의 나머지 부대가 턴지Trungy 주변을 출발한 것은 1600시 무렵이었다. 네 시간 뒤 사단 주력은 별다른 저항 없이 12마일 떨어진 리브히Livry에 도착했으며 이중 나중의 6마일은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리브히 북쪽에서 약간의 저항 - 제8왕립아이리쉬경기병연대를 선도하던 크롬웰 전차가 리브히 북쪽에서 판저레어의 호위중대의 대전차포에 격파된 것 - 이 있었으나 이후 2시간 동안 소총병들과 전차가 투입되어 해당 진지를 일소했다.
힌드 준장은 목표 지역인 라 물로티에흐La Mulotière 근교에 도착하자 독일군이 지키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부대를 정지시켰다. 부대 주력이 일상적인 정비작업을 하는 사이 제8 및 제11(프린스 앨버트(Prince Albert) 경기병연대-사단의 장갑차부대-는 측위를 경계했다. 제11경기병연대는 우익에서 어떤 저항도 발견하지 못한 채 코몽 근처의 미군 제1보병사단과 굳건히 연결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제8경기병연대는 판저레어 사단의 예하부대와 2마일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용어 및 상황설명2012. 6. 23. 0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