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육군협회의 군사전문 매거진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The Army의 군사지식 코너에 주은식 장군이 지난 2009년 1월부터 2년에 걸쳐 "세계 명장의 전투 지휘"와 "군사학 강좌"라는 제목의 기고문들을 연재해왔다.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안들을 여러가지로 소개해주시는 주은식 장군의 열의에는 찬사를 보내지만 연재하신 글에 사실과 다른 오류들이 종종 있는 바 이를 바로잡기 위해 이 부정기 포스팅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단 이 오류에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고려할 필요가 있겠다.)
당연하게도 이 포스팅들은 주은식 장군의 기고문 전체나 기고 의도, 나아가 주은식 장군의 지휘 및 작전 역량을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라 기고문이 논거로 제시한 사례들이 갖고 있던 사실관계상의 오류들을 지적하거나 보충하고, 이를 통해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이해를 넓히자는데에 그 의도가 있음을 밝혀두고자 한다. 따라서 비평의 범위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한정하며 그 형식은 사실 혹은 해석상의 오류가 있는 원문을 인용하고, 오류 부분의 사실 혹은 실체를 지적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게 될 것이다.
퍼가는 것을 허용하지는 않을 예정이니 링크나 트랙백을 이용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
8월 13일, 독일 B군집단에 대한 포위망이 완성되었을 때 몬티는 코트니 하지스의 미 제1군에게 측면지원을 받아 자신이 지휘하는 제21집단군으로 북프랑스, 저지 각국을 거쳐 독일로 진격한다는 단일축선에 의한 공세작전- 소위 예리한 돌파를 제안했다. 노르망디에서 500km 떨어진 현재 연합군의 공세부대 모두를 지원하기에는 수송능력이 충분하지 않고, 대치중인 독일군이 무시해도 좋을 정도라는 것이 그 판단 근거였다. 하지만 미군의 입장에선 이 계획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비록 추격 단계에서 영국군 또한 200마일 가까이 진격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공세를 선도하고 있는 것은 몬티의 영국군이 아니라 패튼의 미 제3군이었으며 현실적으로 독일로 가장 깊숙이 진격한 부대이기도 했다. 더욱이 몬티가 4번의 대규모 공격작전(Operation Perch, Operation Epsom, Operation Charnwood, Operation Goodwood)을 실패하는 사이, 독일군 방어선을 돌파하고, 독일군의 반격 작전을 돈좌시키고 궁극적으로 독일 B군집단을 팔레이즈 포위망에 가둬 버린 주역은 몽고메리의 영국군이 아니라 미군의 공적이라고 생각하던 미군의 장군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발상이었다. (참고로 비트만이 전사한 Operation Totalize가 캐나다군의 승리로 마무리하면서 몬티의 제21집단군 또한 팔레이즈 포켓에 독일군을 가두는데 일정 정도의 성과를 달성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미군의 돌파 이후라는 점에서 어느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긴 어렵다. 심지어 Sandhust Royal Military Academy의 Simon Trew 박사는 Operation Totalize는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Operation Tractable은 충분한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평한다.) 게다가 미군이 돌파에 성공할 때까지 방어선을 돌파한다거나 선도할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뭐랄까 어부지리적 입장이던 지휘관이 공세를 선도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상적인 판단력을 가진 사람으로선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물리적으로도 노르망디에서 가장 멀리까지 진격한 패튼의 제3군을 도리어 후퇴시켜 출발점 가까이로 불러들여야 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말이다. (이것이 주은식 장군의 기고문 캡쳐 중 A-C의 상황설명이다.)
결국 9월 1일 아이크는 미군 장군들과의 협의를 거쳐 몽고메리의 우선권에 개입, 몬티와 패튼이 각자 공격한다는 타협안을 내놨지만 몬티의 부대는 영국제 트럭들이 뻗어버린 바람에, 패튼의 제3군은 물리적 거리로 인한 병참선의 부담으로 공세가 중지되기에 이른다. 한편 워싱턴, 보다 정확히 전쟁이 끝나기 전에 대규모 강하작전을 전개할 것을 원하는 육군 참모총장 조지 C. 마샬 대장과 육군항공대 사령관 헨리 ‘햅’ 아놀드 대장은 아이크에게 압력을 가하는 중이었다. 결국 9월 10일 몬티는 아이크와의 회담에서 마켓가든 작전의 실행을 승인받고 작전에 나선다.
익히 알려진대로 마켓가든 작전의 개요는 제1연합공정군 소속 3개 강하병 사단이 출발선에서 약 20km(13마일) 떨어진 에인트호번(Eindhoven), 85km(53마일) 떨어진 네이메이헨(Nijmegen), 100km (64마일) 떨어진 아른헴(Arnhem)에서 강 또는 운하에 걸려있는 교량들을 점령하면 그 교량 및 통로들을 따라 제30군단이 거의 지리멸렬해진 독일군 방어부대를 돌파하고 점량한 교량들을 확보한다는 것으로 몬티는 이를 통해 단일 축선 공세를 계속할 수 있게 되길 바랬다. 참고로 주은식 장군은 B 블럭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 후 보급문제 해소를 위한 앤트워프항의 개방과 네덜란드에 위치한 V-2 로켓 기지 제거"를 마켓가든 작전의 목적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최소한 안트베르펜(앤트워프) 항의 개방은 마켓가든과 별 상관이 없다. 마켓가든 작전에서 제30군단에 부여된 임무는 아른헴까지의 통로 개척과 그에 따른 네덜란드의 해방 및 요새선의 우회에 있지, 안트베르펜 해방은 임무에 적용되지 않았다. (심지어 마켓 가든 작전의 실패가 확연해진 9월 22일에 개최된 각 군 지휘관 회의에서 아이젠하워는 마켓가든의 중지와 그에 따르는 공세 목표를 조정했는데 여기서 캐나다 제1군의 9월 동안 목표로 슈헬데 강 유역의 일소와 안트베르펜으로의 통로 개척 공격을 계속할 것을 강조하여 명했다는 것 또한 이 기술이 사실이 아님을 반증한다.)
어쨌거나 주은식 장군은 "연합군 진격로의 목을 독일군 기갑부대가 지키고 있다는 네덜란드 저항군의 정보를 사전 탐지하지 못해 몽고메리군 장병 상당수가 독일군 9SS 기갑사단이 배치된 강점에 투하되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라고 서술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매우 다르다. 물론 영국 제1공수사단사 윅히처럼 해당부대를 변명해야 하는 경우도 이와 비슷한 기술을 하며 연합군 첩보조직에 그 책임을 슬쩍 돌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서술 또한 사실과도 약간 거리가 있다. 영국 제1공정군단의 군단장인 레드릭 아더 몬테규 브라우닝 중장은 아른헴에는 소모되어 재편성을 기다리는 기갑사단 1개, 또는 소수의 전차를 가진 대략 3,000명의 보병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고 그것은 거의 옳았기 때문이다. 당시 독일측 자료에 의하면 아른헴 인근에 있던 제9SS기갑사단 호헨슈타우펜의 전력은 중장비가 거의 없는 (전차전력은 비인가로 판터 3대가 전부, 이외에 4호구축전차 2대, 장갑/비장갑 반궤도차량 30여대 장비.) 약 2500명의 인원 뿐이었으며 제10SS기갑사단 프룬즈베르크의 전력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영국군 제1공정사단 붉은 악마가 작전지구에 강하했을 때 방어에 나섰던 독일군은 경무장의 낙하산/글라이더 강하병들을 일거에 몰살시킬 수 있는 강력한 기갑전력을 가진 최정예 SS기갑사단들이 아니라 모델이 동원한 부대들이 도착하는 작전 4일차까지 어디서 방어선이 터져나갈지 모르는 전전긍긍함속에서 제16SS기갑척탄병 교육및보충병대대의 신병, SS하사관학교의 훈련생들, 네덜란드경찰대대의 경찰들, 그리고 공군 레이더 기지의 통신병같은 정예와는 매우 거리가 있는 잡다한 인원들이 장비/병력 양쪽의 열세속에 잘 훈련된 정예들인 낙하산/글라이더 강하병들과 싸워야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마켓 가든이 실패한 이유는 아른헴에 강력한 SS기갑사단들이 있어서가 아니라 몬티와 연합군 수뇌부가 독일군의 능력을 너무 얕잡아본 데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일이다. (마켓 가든 작전의 상세에 대해선 후일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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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게도 이 포스팅들은 주은식 장군의 기고문 전체나 기고 의도, 나아가 주은식 장군의 지휘 및 작전 역량을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라 기고문이 논거로 제시한 사례들이 갖고 있던 사실관계상의 오류들을 지적하거나 보충하고, 이를 통해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이해를 넓히자는데에 그 의도가 있음을 밝혀두고자 한다. 따라서 비평의 범위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한정하며 그 형식은 사실 혹은 해석상의 오류가 있는 원문을 인용하고, 오류 부분의 사실 혹은 실체를 지적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게 될 것이다.
퍼가는 것을 허용하지는 않을 예정이니 링크나 트랙백을 이용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
8월 13일, 독일 B군집단에 대한 포위망이 완성되었을 때 몬티는 코트니 하지스의 미 제1군에게 측면지원을 받아 자신이 지휘하는 제21집단군으로 북프랑스, 저지 각국을 거쳐 독일로 진격한다는 단일축선에 의한 공세작전- 소위 예리한 돌파를 제안했다. 노르망디에서 500km 떨어진 현재 연합군의 공세부대 모두를 지원하기에는 수송능력이 충분하지 않고, 대치중인 독일군이 무시해도 좋을 정도라는 것이 그 판단 근거였다. 하지만 미군의 입장에선 이 계획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비록 추격 단계에서 영국군 또한 200마일 가까이 진격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공세를 선도하고 있는 것은 몬티의 영국군이 아니라 패튼의 미 제3군이었으며 현실적으로 독일로 가장 깊숙이 진격한 부대이기도 했다. 더욱이 몬티가 4번의 대규모 공격작전(Operation Perch, Operation Epsom, Operation Charnwood, Operation Goodwood)을 실패하는 사이, 독일군 방어선을 돌파하고, 독일군의 반격 작전을 돈좌시키고 궁극적으로 독일 B군집단을 팔레이즈 포위망에 가둬 버린 주역은 몽고메리의 영국군이 아니라 미군의 공적이라고 생각하던 미군의 장군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발상이었다. (참고로 비트만이 전사한 Operation Totalize가 캐나다군의 승리로 마무리하면서 몬티의 제21집단군 또한 팔레이즈 포켓에 독일군을 가두는데 일정 정도의 성과를 달성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미군의 돌파 이후라는 점에서 어느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긴 어렵다. 심지어 Sandhust Royal Military Academy의 Simon Trew 박사는 Operation Totalize는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Operation Tractable은 충분한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평한다.) 게다가 미군이 돌파에 성공할 때까지 방어선을 돌파한다거나 선도할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뭐랄까 어부지리적 입장이던 지휘관이 공세를 선도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상적인 판단력을 가진 사람으로선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물리적으로도 노르망디에서 가장 멀리까지 진격한 패튼의 제3군을 도리어 후퇴시켜 출발점 가까이로 불러들여야 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말이다. (이것이 주은식 장군의 기고문 캡쳐 중 A-C의 상황설명이다.)
결국 9월 1일 아이크는 미군 장군들과의 협의를 거쳐 몽고메리의 우선권에 개입, 몬티와 패튼이 각자 공격한다는 타협안을 내놨지만 몬티의 부대는 영국제 트럭들이 뻗어버린 바람에, 패튼의 제3군은 물리적 거리로 인한 병참선의 부담으로 공세가 중지되기에 이른다. 한편 워싱턴, 보다 정확히 전쟁이 끝나기 전에 대규모 강하작전을 전개할 것을 원하는 육군 참모총장 조지 C. 마샬 대장과 육군항공대 사령관 헨리 ‘햅’ 아놀드 대장은 아이크에게 압력을 가하는 중이었다. 결국 9월 10일 몬티는 아이크와의 회담에서 마켓가든 작전의 실행을 승인받고 작전에 나선다.
익히 알려진대로 마켓가든 작전의 개요는 제1연합공정군 소속 3개 강하병 사단이 출발선에서 약 20km(13마일) 떨어진 에인트호번(Eindhoven), 85km(53마일) 떨어진 네이메이헨(Nijmegen), 100km (64마일) 떨어진 아른헴(Arnhem)에서 강 또는 운하에 걸려있는 교량들을 점령하면 그 교량 및 통로들을 따라 제30군단이 거의 지리멸렬해진 독일군 방어부대를 돌파하고 점량한 교량들을 확보한다는 것으로 몬티는 이를 통해 단일 축선 공세를 계속할 수 있게 되길 바랬다. 참고로 주은식 장군은 B 블럭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 후 보급문제 해소를 위한 앤트워프항의 개방과 네덜란드에 위치한 V-2 로켓 기지 제거"를 마켓가든 작전의 목적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최소한 안트베르펜(앤트워프) 항의 개방은 마켓가든과 별 상관이 없다. 마켓가든 작전에서 제30군단에 부여된 임무는 아른헴까지의 통로 개척과 그에 따른 네덜란드의 해방 및 요새선의 우회에 있지, 안트베르펜 해방은 임무에 적용되지 않았다. (심지어 마켓 가든 작전의 실패가 확연해진 9월 22일에 개최된 각 군 지휘관 회의에서 아이젠하워는 마켓가든의 중지와 그에 따르는 공세 목표를 조정했는데 여기서 캐나다 제1군의 9월 동안 목표로 슈헬데 강 유역의 일소와 안트베르펜으로의 통로 개척 공격을 계속할 것을 강조하여 명했다는 것 또한 이 기술이 사실이 아님을 반증한다.)
어쨌거나 주은식 장군은 "연합군 진격로의 목을 독일군 기갑부대가 지키고 있다는 네덜란드 저항군의 정보를 사전 탐지하지 못해 몽고메리군 장병 상당수가 독일군 9SS 기갑사단이 배치된 강점에 투하되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라고 서술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매우 다르다. 물론 영국 제1공수사단사 윅히처럼 해당부대를 변명해야 하는 경우도 이와 비슷한 기술을 하며 연합군 첩보조직에 그 책임을 슬쩍 돌리기도 한다.
"Also, reconnaissance aircraft and the Dutch resistance had spotted some enemy tanks in woods near Arnhem. However, the 21st Army Group command disregarded these photographs, stating that the tanks were "unserviceable". Much of the Allied spy operation in the Netherlands had been turned by the Germans, leading to a distrust of the information. In fact, two Waffen SS Panzer divisions had recently been moved to Arnhem, where "nothing was going on", for refitting. These two divisions were the seriously understrength 9th SS Panzer Division Hohenstaufen and 10th SS Panzer Division Frundsberg, both recovering from their beating in Normandy. The Dutch resistance correctly identified these divisions and passed the information on to the Allies by 10 September.
(또한 정찰기와 네덜란드 레지스탕스들은 아른헴 근처에서 적 전차 몇 대롤 발견했다. 하지만 제21집단군 지휘부는 이 사진들을 무시하고 전차는 "가용하지 않다"고 말했다. 네덜란드에서의 연합군 스파이망은 독일측으로 회유되어 잘못된 정보를 보냈던 것이다. 사실 바펜 SS기갑사단 2개가 최근 아른헴으로 이동해왔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두 사단, 제9SS기갑사단 호헨슈타우펜과 제10SS기갑사단 프룬즈베르크는 노르망디에서의 패배로 인한 심각한 전투력 감소에서 회복중이었다. 네덜란드 레지스탕스들은 이들 사단들을 올바르게 식별하여 이들에 대한 정보를 9월 10일에 연합군 측에 전달했다.)"
(또한 정찰기와 네덜란드 레지스탕스들은 아른헴 근처에서 적 전차 몇 대롤 발견했다. 하지만 제21집단군 지휘부는 이 사진들을 무시하고 전차는 "가용하지 않다"고 말했다. 네덜란드에서의 연합군 스파이망은 독일측으로 회유되어 잘못된 정보를 보냈던 것이다. 사실 바펜 SS기갑사단 2개가 최근 아른헴으로 이동해왔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두 사단, 제9SS기갑사단 호헨슈타우펜과 제10SS기갑사단 프룬즈베르크는 노르망디에서의 패배로 인한 심각한 전투력 감소에서 회복중이었다. 네덜란드 레지스탕스들은 이들 사단들을 올바르게 식별하여 이들에 대한 정보를 9월 10일에 연합군 측에 전달했다.)"
하지만 이 서술 또한 사실과도 약간 거리가 있다. 영국 제1공정군단의 군단장인 레드릭 아더 몬테규 브라우닝 중장은 아른헴에는 소모되어 재편성을 기다리는 기갑사단 1개, 또는 소수의 전차를 가진 대략 3,000명의 보병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고 그것은 거의 옳았기 때문이다. 당시 독일측 자료에 의하면 아른헴 인근에 있던 제9SS기갑사단 호헨슈타우펜의 전력은 중장비가 거의 없는 (전차전력은 비인가로 판터 3대가 전부, 이외에 4호구축전차 2대, 장갑/비장갑 반궤도차량 30여대 장비.) 약 2500명의 인원 뿐이었으며 제10SS기갑사단 프룬즈베르크의 전력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영국군 제1공정사단 붉은 악마가 작전지구에 강하했을 때 방어에 나섰던 독일군은 경무장의 낙하산/글라이더 강하병들을 일거에 몰살시킬 수 있는 강력한 기갑전력을 가진 최정예 SS기갑사단들이 아니라 모델이 동원한 부대들이 도착하는 작전 4일차까지 어디서 방어선이 터져나갈지 모르는 전전긍긍함속에서 제16SS기갑척탄병 교육및보충병대대의 신병, SS하사관학교의 훈련생들, 네덜란드경찰대대의 경찰들, 그리고 공군 레이더 기지의 통신병같은 정예와는 매우 거리가 있는 잡다한 인원들이 장비/병력 양쪽의 열세속에 잘 훈련된 정예들인 낙하산/글라이더 강하병들과 싸워야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마켓 가든이 실패한 이유는 아른헴에 강력한 SS기갑사단들이 있어서가 아니라 몬티와 연합군 수뇌부가 독일군의 능력을 너무 얕잡아본 데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일이다. (마켓 가든 작전의 상세에 대해선 후일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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