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ration Perch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에서 6월 7일부터 14일 사이에 벌어진 영국군의 공세작전이다. 작전의 의도는 독일군이 점유하던 연합군의 북서유럽 진공 초기 단계의 주요 목표인 캉Caen을 포위하여 함락시키는 것이었으나 독일군의 격렬한 저항과 영국군의 미숙한 작전 전개 능력이 맞물려 목표를 달성하기 전에 중지되었다.
Operation Perch는 원래 영국군 제30군단이 해안에 상륙하자마자 캉의 남동쪽으로 진격하려는 의도의 작전이었다. 이 작전을 통해 캉의 조기 해방을 노렸으나 진공 사흘 뒤에도 캉이 여전히 독일군의 손에 있었기 때문에 그 목표가 바뀌어 제1군단을 포함하여 캉을 탈취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양익포위로 확대되었다. 다음날 양익포위의 서쪽 날개를 형성하게 된 제30군단은 해방되기 전까지 몇 번이나 주인을 바꾼 틸리 쉬르 쇨르Tilly sur Seulles 주변에서 독일군과의 격렬한 전투에 말려들기 전까지 남쪽으로 진격해갔다. 반면 D-Day 당일 Operation Tonga의 일환으로 낙하한 영국 공정부대가 확보한 오르느Orne 교두보에서 이틀뒤에 발진한 영국군 제1군단의 공세는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과 지속적인 역공에 마주쳐 거의 진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상자의 증대에 더해 독일군의 붕괴가 곧 닥칠 것이라는 어떤 징후도 없었기 때문에 캉 동쪽으로의 진격은 6월 13일에 중지되었다.
그 사이 서쪽에서 미군의 압력으로 독일군 방어선에 돌파구가 생기자 영국군 지휘부는 틸리 쉬르 쇨르 주변의 전투 임무에서 해제시킨 제7기갑사단을 이 돌파구에 투입, 측익 기동을 실시하여 독일군의 후퇴를 강요하려 한다. 하지만 돌파구를 통해 우회기동하던 영국군 제7기갑사단은 얼마 못가 독일군의 반격에 직면, 빌레 보카즈Villers-Bocage 전투를 포함한 이틀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후퇴했다. 이후 영국군은 제7기갑사단을 보강, 다시 한 번 공세 재개를 시도할 예정이었지만 영국 해협의 강력한 폭풍으로 인해 연합군의 병참선이 심각하게 붕괴되면서 작전도 최종적으로 중지되었다.
돌파구를 만들자마자 곧바로 전투로 확대시킨 영국군의 선택은 여전히 논쟁의 주제가 되어 왔다. 역사가들은 영국의 사단 및 군단 수준의 실패 때문에 캉의 조기 탈취 기회를 무산시켰다는 데엔 동의한다. 하지만 독일군이 공세에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기갑예비를 엄청난 손실을 초래하는 방어 역할에 투입시킴으로서 역공에 나설 역량을 소진시켰다는 관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현재 여기 공개된 것은 Operation Perch에 대한 개괄입니다. 이후 글은 톰과제리 내의 Northwest Europe Theater 게시판에 지속적으로 업데이트 되어 게재됩니다. 이곳의 전문 공개는 개한 및 엔하 윅히라는 집단지성-펌-질에 대한 대비책으로서 앞으로 6개월에서 1년 정도의 embago term을 거친 뒤에나 이뤄질 예정입니다. 이에 대한 방문자 여러분의 많은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대한민국 육군협회의 군사전문 매거진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The Army의 군사지식 코너에 주은식 장군이 지난 2009년 1월부터 2년에 걸쳐 "세계 명장의 전투 지휘"와 "군사학 강좌"라는 제목의 기고문들을 연재해왔다.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안들을 여러가지로 소개해주시는 주은식 장군의 열의에는 찬사를 보내지만 연재하신 글에 사실과 다른 오류들이 종종 있는 바 이를 바로잡기 위해 이 부정기 포스팅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단 이 오류에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고려할 필요가 있겠다.)
차후 포스팅을 통한 기고문의 비판 혹은 지적에 앞서 한 가지 말해둘 것이 있는데 이 오류들이 온전히 기고자의 몫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The Army지는 어떤 방식으로 편집을 하는지 알 수 없으나 우마왕이 몇몇 잡지와 국방홍보지에 1년 반 정도 투고/게재해본 경험에 따르면 필자들은 비교적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 제한된 지면에 이런저런 사실들을 때려넣다 보니 글이 좀 난삽해지는 경향이 있는 반면 기자/편집자는 제한된 지면속에 기사적 압축을 선호하므로 글을 이리저리 쳐내 주제를 선명하게 부각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물론 필자라면 그 문장력이 그 지식 이상이어서 편집진이 손을 댈 필요가 없는 경우가 최선이겠지만 현실은 필자의 문장력은 지식에 비해 모자라는 경우가 많고, 기자/편집자는 지식이 부족하거나 부재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일 기자/편집자가 필자에 못지 않은, 최소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와 강조점을 읽어낼 역량과 지식을 갖고 있어 정리된 글로 만들어낸 상황이라면 글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필자의 몫이겠으나 약정된 지면보다 많은 정보가 들어간 기고문을 쳐내고 축약하는 과정에서 편집자가 해당 내용을 모르는 경우 그 글은 부득이하지만 엉뚱하게 변질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필자가 아닌 편집자에게 일부 책임이 있을 수 있음 또한 지적해두자.
당연하게도 이 포스팅들은 주은식 장군의 기고문 전체나 기고 의도, 나아가 주은식 장군의 지휘 및 작전 역량을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라 기고문이 논거로 제시한 사례들이 갖고 있던 사실관계상의 오류들을 지적하거나 보충하고, 이를 통해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이해를 넓히자는데에 그 의도가 있음을 밝혀두고자 한다. 따라서 비평의 범위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한정하며 그 형식은 사실 혹은 해석상의 오류가 있는 원문을 인용하고, 오류 부분의 사실 혹은 실체를 지적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게 될 것이다.
[#M_아프리카 전역에 대한 서술 비평|접기|캡처한 기사는 엄밀하게 말하면 총론적인 서술로 쓴 것이지만 실제 상황과 거리가 있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두 가지 내용이 혼재되어 있다. 윗 블럭은 유럽 진공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입장 차이, 아랫부분은 몽고메리의 아프리카 전역인데 아프리카 전역에서 몽고메리가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지 않았던 이유, 다시 말해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롬멜의 아프리카 기갑군이 패배한 이후 몽고메리의 영국군이 추격전에 나서지 않았던 이유를 서술한다.
사실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롬멜의 아프리카 기갑군이 패주했을 때 영국군이 추격하지 않은 것을 놓고 여러가지로 이론이 분분했다. 그 범위는 상기 주은식 장군의 기술처럼 조금 뜬금없어 보이는 거창한 기술에서 제법 실체에 접근한 기술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실제적인 이유를 다루는 케이스를 본 적은 거의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추격하지 않았던 것일까? 추격하지 못했던 것일까? 주은식 장군의 기술은 추격하지 않았다....쪽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물론 몬티는 당시 스스로의 판단 이유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짐작할 여지는 남겨두고 있다. 몬티는 자신의 저작, A History of Warfare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마른 전투의 승리 및 그 이후의 조프르의 선택에 대해서 "나는 평생 무수한 전투를 겪으며 전략적으로 바람직한 것은 반드시 이용가능한 자원을 통해 전술적으로 달성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조프르는 그러한 기본적인 진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전투에서 물리적 패배란 있을 수 없다... 오직 정신적인 패배만 가능하다... 승리한 전투란 결코 스스로 졌다고 자인하지 않는 전투다"라는 포슈의 주장에 대해서는 "지휘관이란 용기보다 사리분별이 더 필요할 때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적을 꺾고 싶은 욕망보다 과연 그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이길 가능성이 있고 없는가의 판단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엘 알라메인의 승리 이후에 대한 선택에 대해 "나는 사막전에서 더는 물러서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트리폴리를 거쳐 튀니지로 장거리 행군을 하는 동안 마주칠지도 모르는 위험에 대해 완벽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아직 전열을 재정비하지도 못했으며 비까지 내려 적을 추격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아울러 우마왕이 번역한 보급전의 역사 제 6장에 서술된 롬멜의 패배에 가장 큰 원인이 되었던 것이 병참상의 문제, 즉 적절한 하물 처리 능력을 가진 항구의 부재와 이를 대체하기 위한 육상수송 능력의 부족이었다는 마틴 반 크레펠트의 지적을 생각해보자. 몬티의 제8군이 롬멜의 아프리카 기갑군을 추격하기 위해서는 이 문제를 거꾸로 겪어야 한다. 다시 말해 하물 처리 능력이 있는 적절한 항구가 없다는 점은 영국군도 마찬가지로 겪을 일이므로 영국군이 추격전에 나서지 못한 이유는 한 가지다. 당시 영국 제8군 또한 추격전을 유지할 병참능력이 부재했다고까지 말할 수야 없겠지만 부족했던 것이다. 바꿔 말해 영국군은 추격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추격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도 주은식 장군이 기술한 대로 렌드리스 운운에 기반한 자원 절약 정신 때문이 아니라 적절한 육상수송능력의 부족과 항만의 하물 처리 및 수송능력의 부족 때문이었던 것 뿐이다. 사실 아프리카 전선의 현 단계에서는 렌드리스에 기반하는 서술은 롬멜의 말타 공략 운운에 필적할 정도로 무의미한 핑계인데 이의 반증으로 1941년 겨울, 영국군의 추격작전 크루세이더가 무위로 돌아간 과정을 돌이켜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캡처한 이 블럭의 내용은 두 가지 내용이 혼재되어 있어 그 실상을 파악하기가 어렵게 만들고 있다. 해당 블럭은 사실 마켓가든 이상으로 복잡한 상황을 담고 있는데 마켓가든에 대해 말하기 위해 배경이라고 판단한 노르망디 전역을 너무 줄이다보니 생긴 문제점인 듯 하다. 이해를 돕기 위해 기술된 상황을 인접하게 정리하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몽고메리는 처음부터 1백만 명으로 구성된 45개 사단의 지상군을 지휘했다. 그 외에도 연합군최고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과 불화마저 빚게 되자 미군 사령관들이 지상군 지휘권을 넘겨받아 직접 행사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오마 브래들리 장군과 동열로 격하돼 아이젠하워 휘하에서 21집단군 지휘를 맡게 되었다."와 "그러나 그는 노르망디 상륙 교두보 확보작전과 요충지 카엥시 점령 때 신속하게 행동하지 않고 꾸물거렸다." 및 "그후 몽고메리는 거칠고 신경질적이었지만 그럼에도 연합군의 파리 해방 때 중요한 공헌을 했다."라는 부분으로 나눌 필요가 있다.
먼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몽고메리는 처음부터 1백만 명으로 구성된 45개 사단의 지상군을 지휘했다. 그 외에도 연합군최고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과 불화마저 빚게 되자 미군 사령관들이 지상군 지휘권을 넘겨받아 직접 행사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오마 브래들리 장군과 동열로 격하돼 아이젠하워 휘하에서 21집단군 지휘를 맡게 되었다."라는 기술은 분명한 오류다. 1943년 미-영은 유럽 상륙작전 오버로드와 그 이후의 군사행동을 위해 1943년 후반에 SHAEF를 창설했다. 오버로드 작전 당시를 기준으로 SHAEF가 움직일 수 있는 실제 전력은 몬티가 지휘하는 제21집단군(캐나다 제1군, 영국 제2군) 오마 브래들리가 지휘하는 미 제12집단군(제1군, 제3군), 제6집단군(프랑스 제1군, 미 제7군)으로 구성된 3개 집단군을 주 전투전력으로, 지원전력으로 제1연합공정군, 영국 제2전술항공군, 미 제9육군항공단을 두고 있었다. (참고로 위키에 제시된 미 제9군과 미 제15군은 유럽진공 작전이 벌어진 이후에 추가된 부대다.) 정리하자면 몬티가 상륙작전 이후로 미국 장군들과 분열을 일으켜 지휘권을 잃었다는 기술은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몬티는 제21집단군 사령관이지 SHAEF 지상군 전체를 지휘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약 주은식 장군의 기술대로 몬티가 SHAEF 지상군 전체 지휘권을 갖고 있었다면 도리어 불화를 일으킬 이유가 없다. 스스로 판단한 대로 지휘하고 그 책임을 양 국가에 대해 지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몬티는 미국 지휘관들과 불화를 일으켰다. 왜 그랬을까? 몬티는 애초부터 미국 지휘관들보다 우위에 있던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SHAEF 사령관은 어디까지나 아이크였고 가장 많은 지분을 전개하는 미군의 입장에서도 고분고분 몬티의 지휘를 받을 이유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몽고메리는 처음부터 1백만 명으로 구성된 45개 사단의 지상군을 지휘했다....는 서술은 어째서 나온 것일까? 오버로드 작전의 계획안을 보면 아시겠지만 초기 단계에서 상륙전력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은 것은 영국 해군과 공군이었다. 따라서 상륙 초기 단계에 영국 공군 및 해군과의 원활한 협조를 위해 그 통제권이 몬티의 제21집단군 사령부에 일시적으로 위임시켰을 뿐이다. 또한 상륙 단계에 투입되어 제21집단군의 통제를 받았던 것은 미 제1군과 영국 제2군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어떻게 보더라도 해당 서술은 사실과 거리가 있다.
주은식 장군이 어떤 이유로 이러한 서술을 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작전 및 전황 전개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필자 (혹은 편집진)가 스스로를 아이크에 필적하는 영국을 대표하는 지휘관이라 생각했던 몬티가 이러한 조치를 받아들일 수 없어 자서전에 썼던 것을 - 아마도 육군의 실 전력이 한-미 연합사 휘하에 있기 때문에 감정이입을 느껴서인지도 모르겠지만 -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기술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어쨌거나 해당 기술은 사실과 분명한 거리가 있다.
또한 두 번째의 "그러나 그는 노르망디 상륙 교두보 확보작전과 요충지 카엥시 점령 때 신속하게 행동하지 않고 꾸물거렸다." 및 "그후 몽고메리는 거칠고 신경질적이었지만 그럼에도 연합군의 파리 해방 때 중요한 공헌을 했다."라는 기술은 전혀 상응하지 않는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한국에서는 인천 상륙작전에 대한 선전들 때문인지는 몰라도 상륙작전이란개념을 외통수에 몰린 전선을 한방에 뒤집는..... 뭐랄까 속된 말로 로또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이 상륙작전들이 항상 전황을 뒤집은 것은 아니다. 상륙작전이 성공한 경우, 그 원인은 기습 효과. 혹은 압도적 전력을 모아 장군을 부르는 경우였을 뿐이다. 비록 WWII 당시 미-영 연합군, 특히 미군은 다수의 상륙작전을 성공시켰고 그것을 통해 새 전선을 열었던 것 또한 사실이지만 가령 1942년 디에프같은 경우는 처절한 실패였고, 이탈리아 안지오의 경우는 그 전략목적을 전혀 달성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상륙작전은 어떤 계기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상륙작전의 성공"만"으로 한타에 전황을 뒤집는 로또는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상대방이 전력을 전개하고 기동시킬 공간이 있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노르망디의 경우가 바로 딱 그러했다. 물론 노르망디 전역이 팔레이즈 포위전을 거쳐 독일군의 패배로 돌아간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것은 단순히 결과론일 뿐이다. 대륙진공작전에서 영국군, 적어도 몬티는 조역으로 남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 때문에 보다 독일과 가까운 지역에 상륙했고, 미군은 보다 먼 지역에 상륙시켰다. 하지만 첫 두 달 동안 연합군은 캉 선에 묶여 있어야 했고 영국군이 캉에 묶여 있던 시점에 미군 또한 보다 획기적인 성공을 이뤄낸 것도 아니다. 몬티가 꾸물거렸다고 말하려면 대책없이 가만히 있었다는 이야긴데 실제로는 그런 것도 아니었다. 몬티는 4번의 대규모 공세를 발진시켰고 그때마다 독일군의 방어에 예상대로, 혹은 그 이상의 저항을 받으며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주저앉았을 뿐이다. 이는 동시에 그 아래에 기술된 "그후 몽고메리는 거칠고 신경질적이었지만 그럼에도 연합군의 파리 해방 때 중요한 공헌을 했다."는 기술과 상치되기도 한다.
사실 노르망디 전역에서 독일군을 패배로 몰아간 것은 몬티가 몬티와 영국군이 시도한 4번의 대규모 공세 작전 때문이 아니라 방어전 과정에서 독일군이 감수해야 했던 전력소모, 상황 오판에 따른 축차투입에 의한 전력 열세, 무엇보다 본국에서 좀 더 멀었던 미군쪽 전선의 방어밀도가 상대적으로 낮아 적절한 예비대를 둘 수 없었던 상황들 때문에 미군의 돌파 시도를 막지 못했고, 히틀러의 명령으로 철수조차 하지 못한 채 무의미하면서 성공 가능성도 높지 않았던 모르탱 지역의 역습, 뤼티히 작전까지 실패로 돌아가면서 결국 팔레즈 포위환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한 추가적인 서술은 곧 마켓 가든 작전의 배경이 되는 바 아래에서 좀 더 자세히 기술하기로 하자.)
정리하자면 몬티가 파리 해방에 일정부분 공헌한 것까지 부정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작전의 성공에 대한 중요한 공헌은 미군, 특히 과감한 돌진을 성공시킨 패튼에게 돌아가야 할 일이다. 비록 그것이 전적으로 패튼의 공적은 아니라 하더라도 말이다.
이 부분은 뭔가 장황하다는 느낌을 감출 수 없다. 왜냐하면 블럭 A와 C는 마켓가든 작전이 시도된 전반적인 배경, 다시 말해 팔레이즈 포켓 이후 미-영 연합군의 독일 본토 진공에 대한 시각차이를 설명하고 있고 블럭 B와 D는 마켓가든 작전의 직접 배경과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 내용들이 서로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M_미군 장성들이 주장한 광역 전선 진격|접기|
8월 13일, 독일 B군집단에 대한 포위망이 완성되었을 때 몬티는 코트니 하지스의 미 제1군에게 측면지원을 받아 자신이 지휘하는 제21집단군으로 북프랑스, 저지 각국을 거쳐 독일로 진격한다는 단일축선에 의한 공세작전- 소위 예리한 돌파를 제안했다. 노르망디에서 500km 떨어진 현재 연합군의 공세부대 모두를 지원하기에는 수송능력이 충분하지 않고, 대치중인 독일군이 무시해도 좋을 정도라는 것이 그 판단 근거였다. 하지만 미군의 입장에선 이 계획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비록 추격 단계에서 영국군 또한 200마일 가까이 진격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공세를 선도하고 있는 것은 몬티의 영국군이 아니라 패튼의 미 제3군이었으며 현실적으로 독일로 가장 깊숙이 진격한 부대이기도 했다. 더욱이 몬티가 4번의 대규모 공격작전(Operation Perch, Operation Epsom, Operation Charnwood, Operation Goodwood)을 실패하는 사이, 독일군 방어선을 돌파하고, 독일군의 반격 작전을 돈좌시키고 궁극적으로 독일 B군집단을 팔레이즈 포위망에 가둬 버린 주역은 몽고메리의 영국군이 아니라 미군의 공적이라고 생각하던 미군의 장군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발상이었다. (참고로 비트만이 전사한 Operation Totalize가 캐나다군의 승리로 마무리하면서 몬티의 제21집단군 또한 팔레이즈 포켓에 독일군을 가두는데 일정 정도의 성과를 달성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미군의 돌파 이후라는 점에서 어느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긴 어렵다. 심지어 Sandhust Royal Military Academy의 Simon Trew 박사는 Operation Totalize는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Operation Tractable은 충분한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평한다.) 게다가 미군이 돌파에 성공할 때까지 방어선을 돌파한다거나 선도할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뭐랄까 어부지리적 입장이던 지휘관이 공세를 선도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상적인 판단력을 가진 사람으로선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물리적으로도 노르망디에서 가장 멀리까지 진격한 패튼의 제3군을 도리어 후퇴시켜 출발점 가까이로 불러들여야 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말이다. (이것이 주은식 장군의 기고문 캡쳐 중 A-C의 상황설명이다.)
결국 9월 1일 아이크는 미군 장군들과의 협의를 거쳐 몽고메리의 우선권에 개입, 몬티와 패튼이 각자 공격한다는 타협안을 내놨지만 몬티의 부대는 영국제 트럭들이 뻗어버린 바람에, 패튼의 제3군은 물리적 거리로 인한 병참선의 부담으로 공세가 중지되기에 이른다. 한편 워싱턴, 보다 정확히 전쟁이 끝나기 전에 대규모 강하작전을 전개할 것을 원하는 육군 참모총장 조지 C. 마샬 대장과 육군항공대 사령관 헨리 ‘햅’ 아놀드 대장은 아이크에게 압력을 가하는 중이었다. 결국 9월 10일 몬티는 아이크와의 회담에서 마켓가든 작전의 실행을 승인받고 작전에 나선다.
익히 알려진대로 마켓가든 작전의 개요는 제1연합공정군 소속 3개 강하병 사단이 출발선에서 약 20km(13마일) 떨어진 에인트호번(Eindhoven), 85km(53마일) 떨어진 네이메이헨(Nijmegen), 100km (64마일) 떨어진 아른헴(Arnhem)에서 강 또는 운하에 걸려있는 교량들을 점령하면 그 교량 및 통로들을 따라 제30군단이 거의 지리멸렬해진 독일군 방어부대를 돌파하고 점량한 교량들을 확보한다는 것으로 몬티는 이를 통해 단일 축선 공세를 계속할 수 있게 되길 바랬다. 참고로 주은식 장군은 B 블럭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 후 보급문제 해소를 위한 앤트워프항의 개방과 네덜란드에 위치한 V-2 로켓 기지 제거"를 마켓가든 작전의 목적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최소한 안트베르펜(앤트워프) 항의 개방은 마켓가든과 별 상관이 없다. 마켓가든 작전에서 제30군단에 부여된 임무는 아른헴까지의 통로 개척과 그에 따른 네덜란드의 해방 및 요새선의 우회에 있지, 안트베르펜 해방은 임무에 적용되지 않았다. (심지어 마켓 가든 작전의 실패가 확연해진 9월 22일에 개최된 각 군 지휘관 회의에서 아이젠하워는 마켓가든의 중지와 그에 따르는 공세 목표를 조정했는데 여기서 캐나다 제1군의 9월 동안 목표로 슈헬데 강 유역의 일소와 안트베르펜으로의 통로 개척 공격을 계속할 것을 강조하여 명했다는 것 또한 이 기술이 사실이 아님을 반증한다.)
어쨌거나 주은식 장군은 "연합군 진격로의 목을 독일군 기갑부대가 지키고 있다는 네덜란드 저항군의 정보를 사전 탐지하지 못해 몽고메리군 장병 상당수가 독일군 9SS 기갑사단이 배치된 강점에 투하되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라고 서술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매우 다르다. 물론 영국 제1공수사단사 윅히처럼 해당부대를 변명해야 하는 경우도 이와 비슷한 기술을 하며 연합군 첩보조직에 그 책임을 슬쩍 돌리기도 한다.
"Also, reconnaissance aircraft and the Dutch resistance had spotted some enemy tanks in woods near Arnhem. However, the 21st Army Group command disregarded these photographs, stating that the tanks were "unserviceable". Much of the Allied spy operation in the Netherlands had been turned by the Germans, leading to a distrust of the information. In fact, two Waffen SS Panzer divisions had recently been moved to Arnhem, where "nothing was going on", for refitting. These two divisions were the seriously understrength 9th SS Panzer Division Hohenstaufen and 10th SS Panzer Division Frundsberg, both recovering from their beating in Normandy. The Dutch resistance correctly identified these divisions and passed the information on to the Allies by 10 September.
(또한 정찰기와 네덜란드 레지스탕스들은 아른헴 근처에서 적 전차 몇 대롤 발견했다. 하지만 제21집단군 지휘부는 이 사진들을 무시하고 전차는 "가용하지 않다"고 말했다. 네덜란드에서의 연합군 스파이망은 독일측으로 회유되어 잘못된 정보를 보냈던 것이다. 사실 바펜 SS기갑사단 2개가 최근 아른헴으로 이동해왔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두 사단, 제9SS기갑사단 호헨슈타우펜과 제10SS기갑사단 프룬즈베르크는 노르망디에서의 패배로 인한 심각한 전투력 감소에서 회복중이었다. 네덜란드 레지스탕스들은 이들 사단들을 올바르게 식별하여 이들에 대한 정보를 9월 10일에 연합군 측에 전달했다.)"
하지만 이 서술 또한 사실과도 약간 거리가 있다. 영국 제1공정군단의 군단장인 레드릭 아더 몬테규 브라우닝 중장은 아른헴에는 소모되어 재편성을 기다리는 기갑사단 1개, 또는 소수의 전차를 가진 대략 3,000명의 보병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고 그것은 거의 옳았기 때문이다. 당시 독일측 자료에 의하면 아른헴 인근에 있던 제9SS기갑사단 호헨슈타우펜의 전력은 중장비가 거의 없는 (전차전력은 비인가로 판터 3대가 전부, 이외에 4호구축전차 2대, 장갑/비장갑 반궤도차량 30여대 장비.) 약 2500명의 인원 뿐이었으며 제10SS기갑사단 프룬즈베르크의 전력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영국군 제1공정사단 붉은 악마가 작전지구에 강하했을 때 방어에 나섰던 독일군은 경무장의 낙하산/글라이더 강하병들을 일거에 몰살시킬 수 있는 강력한 기갑전력을 가진 최정예 SS기갑사단들이 아니라 모델이 동원한 부대들이 도착하는 작전 4일차까지 어디서 방어선이 터져나갈지 모르는 전전긍긍함속에서 제16SS기갑척탄병 교육및보충병대대의 신병, SS하사관학교의 훈련생들, 네덜란드경찰대대의 경찰들, 그리고 공군 레이더 기지의 통신병같은 정예와는 매우 거리가 있는 잡다한 인원들이 장비/병력 양쪽의 열세속에 잘 훈련된 정예들인 낙하산/글라이더 강하병들과 싸워야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마켓 가든이 실패한 이유는 아른헴에 강력한 SS기갑사단들이 있어서가 아니라 몬티와 연합군 수뇌부가 독일군의 능력을 너무 얕잡아본 데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일이다. (마켓 가든 작전의 상세에 대해선 후일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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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앞서도 말했듯이 어디까지나 주은식 장군이 말하려는 "몽고메리의 전투지휘와 리더십이 주는 교훈"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은식 장군의 글에 담겨있는 사실과 전후관계에 대한 오류지적과 비판일 뿐이다. 따라서 이 부분을 특별히 비판할 생각은 없지만 우마왕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구체적인 사실과 교훈을 연결할 것이 아니었다면 소위 몬티의 전성기였던 엘 알라메인까지 아프리카, 혹은 시칠리아 상륙까지의 사례로도 그 의도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을 따름이다.
그러다보니 외부에서의 접근이 쉽지 않아 외부 매체의 기고문에 대한 사실관계상의 오류들을 지적하거나 보충하고, 이를 통해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이해를 넓힌다는 부분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의 힌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가령 외부매체에 대한 비판인 경우 정당한 반론을 허용할 필요가 있으나 현재의 CUG 시스템에선 그것의 소화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여러가지 상황들을 고려한 결과 외부와의 소통을 위해 블로그를 개설하기로 했습니다.
글을 통한 소통을 원하시는 분들께서는 Notice의 방문하시는 분들께에 적혀있는 사항들을 잘 숙지해주시기 바랍니다. 만일 이를 어기시는 분들께는 상응하는 대우를 해드리겠사오니 이 점 양해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