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국 기갑장비를 주제로 하는 일련의 포스팅들을 하고 있는 이글루스의 모 님이 자신의 얼음집에 하이브리드 전차에 대한 일련의 포스팅을 전개하고 계시다. 그런데 그 일련의 포스팅들을 보신 지인이 그 내용이 맞는 야그냐고 질문을 해 왔다. 우마왕이 하던 이야기랑 내용이 다르다는 거지. 그래서 가서 해당 포스팅을 봤다. 보고난 소감은 대체 뭔 소리를 하시는 겐지.,,, 소설은 좀 자제해주셨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의도야 어찌 되었건 아쉽게도 포스팅의 내용은 매우 혼동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덕국 전차 연구자들이 굳이 하이브리드라고 부르는 경우를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는가 하면, 덕국 전차 연구가들이 최소한 이제는 하이브리드로 분류하지 않는 사례를 하이브리드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용어 설명에 대한 오해도 빠지지 않는다, 이에 우마왕은 몇 번에 걸쳐 실제 사례를 통해 독일 하이브리드 전차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사전적 정의부터 살펴보자. 하이브리드란 이종간 교배로 태어난 혼혈종을 의미하고, 종이란 생물학적 계층분류의 최소단위이자 전반적으로 동일한 유전형질을 나타내는 개체군의 포괄집단이라고 정의된다. 문제는 사전적 정의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전적 정의일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 생물계의 개체들은 사전적 정의와 딱딱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령 한 대륙의 물수리가 독수리의 방계라면 다른 대륙의 물수리는 독수리 방계가 아닌 황새의 방계더라...라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출발점은 하나의 종이었지만 돌연변이라거나 지리적 고립성등으로 인해 다른 종이 되어비리는 경우도 존재하는 것이다.
전차나 그 외 기계장비는 2세 개체가 생길 수는 없으니 차종간의 구성요소 호환 여부가 차종의 동일성 여부를 파악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바꿔 말해 이종간 부품을 혼용하는 경우, 하이브리드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문제는 이 또한 생물학적 종의 분류만큼이나 헷갈리는 문제다. 가령 같은 종으로 구분되는 차량이 구성요소를 바꾼 경우, 별도의 차종으로 구분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 법이다. 가령 하이브리드라고 부르는 경우는 언제일까? 물론 페르디넌트/엘레판트, 혹은 VK4502처럼 하이브리드 동력계를 사용하는 경우에도 하이브리드 전차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이들은 최근의 하이브리드 동력 차량들 마냥 내연기관과 전기모터를 혼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엔진을 돌려 발전기로 전기를 일으킨 뒤 미션의 역할을 대신하는 전기모터를 돌리는 것이므로 엄밀하게는 하이브리드 동력 구조도 아닌 셈이지만 말이다. 다른 사례를 생각해보자. 통칭 이지에잇으로 불리는 M4A3E8의 경우 기본형이라 할 만한 M4A3와 비교해보면 주포와 포탑이 달라지고, 주행기구 또한 달라졌으며 심지어 차체의 구조도 좀 달라진다. 이런 식으로 마치 생물학적 종에서 나타나는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처럼 기본 차종에 새로운 구성요소들이 도입되는 경우, 이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생긴다. 마찬가지로 이지에잇의 서스펜션 HVSS를 M4A1에 이식한 M4A1E8의 경우엔 하이브리드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런데 M4/M4A1의 용접 차체와 주조차체를 결합한 경우는 하이브리드 셔먼이라고 부른다. 정리하면 하드웨어적으로 볼 때는 두 사례 모두 이종간 부품의 혼용이므로 하이브리드 차량으로 부를 수도 있지만 단순히 이종간 부품을 사용했다 해서 무조건 하이브리드 타입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따라서 하이브리드를 말하는 데엔 어떤 기준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앞서 동력원의 경우는 제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으니 하이브리드는 형식상의 문제로 한정할 필요가 있다. 전세계 각국의 전차 모두를 살펴보면서 하이브리드 여부를 판정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우선 너무나 거창한 이야기인데다 국가별로, 시대별로, 제반 상황 별로 다른 상황에서 일관성있는 기준을 적용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결국 애초에 하이브리드의 논의 대상이던 티거와 판터에 한정하여, 즉 WWII 당시의 덕국제 장갑전투차량의 사례만으로 논의를 좁혀 다루는 것이 티거와 판터의 하이브리드 여부를 파악하는 현실적인 기준이 될 것이다.
당연하게도 1호전차, 2호전차, 3호전차, 4호전차, 5호전차, 6호전차로 이어지는 로마숫자 분류명은 종이라고 하기는 굉장히 느슨하다. 가령 3호전차의 경우 3.7cm, 5cm/L42, 5cm/L60, 7.5cm/L24로 이어지는 4종의 주포를 장착했으머 엔진의 형식이 바뀐다거나 미션의 형식이 바뀌는 것은 물론이요 장갑의 두께, 그외 각종 부품의 도입 및 폐지 등으로 인해 같은 전차로 보기가 쉽지 않음에도 3호전차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심지어 포탑 대신 고정식 전투실에 직접 주포를 장착한 형식까지도 3호차대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다시 말해 이 로마 숫자로 구분되는 이름은 종이 아니라 속이나 과에 해당하는 분류로 봐야 할 일이다. 그렇다면 덕국 전차에는 종에 해당하는 분류가 없을까? 그럴 리가? Ausführung(형식 정도로 번역하면 되려나)라는 이름의 분류가 존재한다. 가령 Pzkpfw III Ausf.E라는 표현은 Panzerkampfwagen III Ausführung E의 약자이며 3호전차 E형으로 번역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Ausführung은 엔진, 무장, 주행기구, 그외 기타 생산상의 주요 변화마다 붙어 원형과 달라진 점이 있음을 표기하는데 사용되었다. 다음 글에서 실제 사례를 통해 개념과 실상을 정리해보도록 하자.
제1SS기갑군단은 침공에 대응하기 위해 6월 7일 오후 서부기갑집단에서 제7군으로 전속되었다. OB West의 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Gerd von Rundstedt 원수는 게이어 폰 슈베펜부르크Geyr von Schweppenburg 대장에게 6월 10일까지 반격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적시에 부대를 집결시킬 수 없을 것이라며 에르빈 롬멜 Erwin Rommel 원수가 이를 중지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용한 독일군 부대들은 그들의 주둔지를 떠나 연합군이 상륙한 해안을 향해 달려갔다. 제1SS기갑군단은 독일 육군에서 가장 강력한 편제를 가졌다는 판저레어 기갑사단과 무서운 아이들 제12SS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 그리고 일단은 베테랑 제21기갑사단으로 구성된 강력한 부대였다. 샤르트르Chartres를 떠나 90마일을 행군하는 동안 연합군의 항공공격에 노출되어 200대 이상의 차량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판저레어 사단은 제1SS기갑군단에 맞서기 위해 제30군단이 집결중인 틸리 쉬르 쇨르 지역에 6월 9일 밤에 도착했다. 제30군단은 제50보병사단이 성공적으로 진격했지만 제1SS기갑군단 예하 부대와 마주쳤기 때문에 캉 외곽에서 더 이상 진격을 하지 못했다. 이들과 맞선 제1SS기갑군단은 제12SS기갑사단과 제21기갑사단 예하 부대는 제716초계보병사단 잔여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30군단의 공격
제1SS기갑군단이 예하 3개 사단을 집중시킨 대규모 반격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캉 북쪽의 영국-캐나다 해안 교두보에 대해서는 몇 번의 공세가 이뤄졌다. 6월 9일 아침에는 캄프그루페 마이어와 제30차량화여단의 잔여가 바이외 북쪽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공세를 발진시켰다. 이날 늦게 제30군단은 제50 보병사단이 틸리 쉬르 쇨르 북동쪽 인근에 도착하면서 미군과의 지상연결에 성공했을 때 판저레어의 첫 번째 전차들과 조우했다. 이날 저녁 동안 판저레어와 제12SS기갑사단 예하 전차들이 역공에 나섰다. 그들의 역공은 영국군 1개 중대를 괴멸시켰지만 다음날 아침에 중지되었다. 6월 10일 제7기갑사단은 제50보병사단 휘하 제56보병여단을 배속받아 제50보병사단의 전선을 넘어 공격에 나섰다. 이날 밤 사단은 틸리 쉬르 쇨르 북서쪽 외곽에 도달했고 다음날 예하부대들은 시가지로 진입, 중앙 교차로를 확보했다. 하지만 곧이어 판저레어가 발진시킨 몇 번의 역공에 후퇴를 강요당하면서 영국군의 점령은 잠시로 끝났다. 보카즈에 기댄 제50사단의 후속 시도는 판저레어의 만만찮은 저항을 넘지 못하고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6월 11일, B군집단은 영국군 제2군과 맞서던 기갑전력을 대신하여 보병부대를 배치하고 기갑전력을 카렝탕 지역으로 전환시켜 쉘부르에 대한 위협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제2군의 공세가 시작되고 아돌프 히틀러의 반대가 겹치면서 롬멜은 이 기동을 조직화할 수 없었다. 다음날 롬멜은 허가없이는 어떠한 후퇴도 있을 수 없으며, 아울러 오르느 교두보를 시작으로 동쪽에서 서쪽에 펼쳐진 연합군의 상륙거점을 분쇄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받았다.
제1군단의 공격
제30군단이 틸리 쉬르 쇨르의 통제권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를 벌이는 사이 제1군단의 전선은 제51[하이랜드]보병사단과 제4기갑여단의 포진이 지연되면서 6월 12일로 공세일자가 수정되었다. 루드비히 포틴Ludovic Fortin은 이 사건은 제51보병사단의 단독공세였으며 제4기갑여단이 투입된 첫 번째 대규모 공세는 Operation Epsom에서 제50보병사단을 지원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어쨌거나 6월 10일, 기갑부대의 지원을 받은 독일 보병들이 제6공정사단의 낙하산병들이 operation Tonga의 결과로 확보한 뒤 제51보병사단과 제4기갑여단의 도착을 기다리던 오르느 동안 교두보에 대한 반격을 시작했다. 낙하산병들은 해군의 함포 사격의 지원을 받으며 교두보를 고수하는데 성공했고, 반격에 투입되었다가 포로가 된 독일군의 어느 장교는 지난 12시간 동안의 전투에서 자신의 대대가 실제적으로 전멸했다고 말했다. 저녁 무렵 독일군은 랑빌의 탈환을 시도했으나 이 공격도 정지되었고, 역습을 달했다. 공수병들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6월 10일 제51보병사단과 제4기갑여단의 도착까지 오르느강 교두보를 고수하던 제6공수사단에 대한 기갑부대의 지원을 받는 독일보병들의 공격이 이어졌다. 공수부대원들은 함포지원을 받으며 견고히 방어했으며 이날 포로로 잡힌 독일군 장교는 12시간의 전투로 “대대가 완전히 일소되었다.”고 말했다. 이날 저녁 독일군은 랑빌Ranville의 탈환을 시도했으나 심각한 손실에도 불구, 감투정신을 발휘한 공수부대원들의 견고한 방호 앞에 결국 정지되었다. 저녁이 되면서 제51보병사단의 선도부대가 도착했고 다음날 아침에는 브레빌Bréville에 대한 공세에 나섰다. 엄청난 사상자에도 불구하고 사단의 다른 부대들은 투프레빌Touffreville을 장악했다. 6월 11일 오후동안 캐나다군 여왕직할소총병대와 제1경기병대대는 제50보병사단 예하 제69여단의 공격을 돕기 위해 르 메닐 빠뜨히Le Mesnil-Patry를 장악하기 위한 공세-르 메닐 빠뜨히 전투-에 나섰으나 엄청난 피해를 입고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다.
6월 12일, 브레빌 지역에서 오르느 교두보에 대한 보다 많은 독일군의 공세가 시도되었다. 전투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고 사상자 양측 모두 상당했으나 저녁이 되면서 독일군이 후퇴해 버렸다. 이 결정이 영국군에게 수비 지역에 대한 돌파구를 막고 브레빌을 확보하게 해줬다. 공수병연대 제12대대의 공격으로 자정 무렵에 마을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공격에 나섰던 160명중 141명의 사상자를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제51보병사단은 상테 호노린느Sainte Honorine 남쪽을 향한 제21기갑사단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여 전혀 진격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캉 동쪽에 대한 공격은 6월 13일부로 중지되었다.
코몽 갭과 라이트 훅
캉의 포위가 중지된 사이 영국군 제2군과 미 제1군의 접합점이라 할 수 있는 제30군단의 우익에서는 잠재적으로 유리한 상황이 발전하고 있었다. D-Day 이래 영국군과 미군은 제84군단의 예비를 포함한 5개 독일군 전투단을 격파하면서 트레비에흐Trévières-아지Agy 구역엔 이미 난타당한 제352보병사단 뿐이었다. 제352보병사단은 6월 6일 오마하 비치 방어 이래 지속적으로 작전에 참가해왔고 강요된 막중한 손실에 비해 교체는 극히 적었다. 때문에 제352보병사단의 좌익은 미 육군 제1보병사단 및 제2보병사단의 심대한 압박에 노출되어 붕괴되기에 이른다. 진지를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된 제352보병사단은 6울 9일~10일 사이의 밤을 틈타 생로 방면으로 후퇴했고 그 결과 코몽-리반테Caumont-l'Éventé 근처의 독일군 방어선에는 연합군이 “코몽 갭”으로 부르게 될 약 7.5 마일 폭의 돌파구가 형성된다. 이 지역에는 제17SS기갑척탄병사단의 수색대대 뿐이었고, 사단의 주력은 보다 서쪽의 카랑탕 반도에 있던 미군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독일군은 제2기갑사단을 투입하여 이 돌파구를 메울 계획이었으나 사단 주력은 6월 10일에도 여전히 아미앵과 알랭송 사이에 잡혀 있었기 때문에 사단 전력이 도착하려면 사흘이 필요했다. 제47기갑군단의 군단장 한스 프라이헤어 폰 풍크Hans Freiherr von Funck 대장은 전력을 완전히 집결시킬 때 까지는 제2기갑사단의 투입을 꺼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의 수색대대에게 코몽으로 기동하여 고지대를 확보하라는 명령을 보냈다. 더하여 제1SS기갑군단의 군단장 제프 디트리히는 판저레어와 제12SS기갑사단의 개방된 좌익을 커버하기 위해 그의 유일한 예비 전력인 제101SS중전차대대를 양 사단의 후방에 위치시켰다. 보베Beauvais를 떠나 닷새간 달려와 6월 12일에 막 이 지역에 도착한 제101SS중전차대대 제2중대장 미하일 비트만은 영국군과 마찬가지로 빌레 보카즈 Vllers-Bocage 인근의 고지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가용한 티거 5대를 빌레 보카즈의 213 고지 바로 정남쪽에 포진시켰다.
6월 12일 Operation Perch는 수정되었다. 기회가 왔음을 인식한 제30군단의 군단장 제라드 버크널Gerard Bucknall 중장은 조지 어스킨George Erskine 소장이 지휘하던 제7기갑사단에 틸리 쉬르 쇨르 근처의 전투에서 벗어나 독일군 방어선의 돌파구를 통해 빌레-보카즈를 점령하고 판저 레어 사단의 측익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을에서 2.6km 떨어진 고지가 목표였는데 그것을 점령하면 판저 레어의 후방에 있는 고지를 차지함과 동시에 주요 병참선을 끊어 판저레어 사단의 후퇴, 혹은 항복을 강요하고 Operations Fluid를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제7기갑사단의 측익 기동을 지원하기 위해 제50보병사단은 주공 노력을 틸리 쉬르 쇨르 주변의 판저레어를 압박하는 데 쏟아부었다. 동시에 미육군 제5군단의 예하부대들이 전방으로 밀어붙였다. 미 육군 제1보병사단은 코몽의 독일군을 격파하고 고지를 확보하며, 제2보병사단은 생로 방면으로 공격했다.
독일군의 취약성을 완전히 이용하기 위해서는 빠른 작전이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명령에 따라 틸리 쉬르 쇨르로 진격하고 있던 제7기갑사단의 재배치는 느릿느릿 진행되었다. 어스킨 소장과 제22기갑여단의 여단장 힌드Hinde 준장은 1200시에 회의를 소집했다. 힌드 준장은 즉시 돌파구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131보병여단이 작전을 준비함과 동시에 제50보병사단의 후방에 있던 제56보병여단이 제7기갑사단으로 전속되었다. 이제 제131보병여단과 제22기갑여단으로 구성된 제7기갑사단의 선도부대가 출발했다. 제8왕립아이리쉬경기병연대King's Royal Irish Hussars - 제7기갑사단의 기갑수색연대 -가 여단의 진격로를 정찰하기 시작하고, 사단의 나머지 부대가 턴지Trungy 주변을 출발한 것은 1600시 무렵이었다. 네 시간 뒤 사단 주력은 별다른 저항 없이 12마일 떨어진 리브히Livry에 도착했으며 이중 나중의 6마일은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리브히 북쪽에서 약간의 저항 - 제8왕립아이리쉬경기병연대를 선도하던 크롬웰 전차가 리브히 북쪽에서 판저레어의 호위중대의 대전차포에 격파된 것 - 이 있었으나 이후 2시간 동안 소총병들과 전차가 투입되어 해당 진지를 일소했다.
힌드 준장은 목표 지역인 라 물로티에흐La Mulotière 근교에 도착하자 독일군이 지키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부대를 정지시켰다. 부대 주력이 일상적인 정비작업을 하는 사이 제8 및 제11(프린스 앨버트(Prince Albert) 경기병연대-사단의 장갑차부대-는 측위를 경계했다. 제11경기병연대는 우익에서 어떤 저항도 발견하지 못한 채 코몽 근처의 미군 제1보병사단과 굳건히 연결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제8경기병연대는 판저레어 사단의 예하부대와 2마일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Background
마일스 뎀프시Miles Dempsey 경의 제2군은 오버로드Overlord 작전으로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비행장을 손에 넣음과 동시에 쉘부르Cherbourg로 기동할 미 제1군의 좌익을 보호하도록, 캉을 확보하고 캉 남동쪽의 코몽 레븡테 Caumont-l'Éventé에 전선을 형성할 것을 요구했다. 노르망디의 주도 캉은 크록커 Crocker 중장이 지휘하는 영국군 제1군단에 할당된 D-Day 최우선 작전 목표로 그 실행은 소드 비치로 상륙한 영국 제3보병사단에게 부여되었다. 캉과 그 주변의 조기 점령에 성공한다면 영국 제2군에게 보다 남쪽으로 밀어붙여 팔레이즈Falaise를 점령하고 우측으로 공세축을 옮겨 아흐줭텅Argentan에서 투케스Touques 강으로 진격할 수 있는 적절한 공간을 제공할 수 있었다. 캉과 비몽Vimont 사이의 지형은 특히 유망했는데 탁 트인 건조지형이라 빠른 공세작전을 전개하는 데 적합했다. 연합군은 독일군에 비해 전차 및 기동부대, 그리고 수송능력에서 엄청난 우위가 있었기 때문에 보다 유기적인 교전을 통해 이를 최대한 살릴 수 있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역사가 L F 엘리스Ellis가 서술한대로 너무나 야심적인 작전임도 분명했다.
Original plan
D-데이 이전의 기안에 의하면 Operation Perch는 영국군의 위력으로 캉 남동쪽에서 돌파구를 형성한다는 의도로 기획되었다. 당시 영국군 제2군은 존 크록커John Crocker 중장이 지휘하는 제51[하이랜드Highland]보병사단과 제4기갑여단을 예하에 둔 제1군단과 제7기갑사단, 제49[웨스트라이딩West Riding]보병사단, 제50[노섬브리안Northumbrian]보병사단. 그리고 제8기갑여단을 예하에 둔 제30군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작전은 제30군단에 부여되었다. 작전 개요는 6월 6일 골드 비치 구역에 상륙할 제50[노섬브리안Northumbrian]은 보병사단 내륙으로 빠르게 기동, 바이외Bayeux를 점령하고 틸리 쉬르 쇨르Tilly sur Seulles로의 진격로를 여는 임무가 주어졌고, 제8기갑여단으로 강화된 제7기갑사단은 제50[노섬브리안Northumbrian] 보병사단을 초월하여 틸리 쉬르 쇨르Tilly sur Seulles를 지나 칼바도스 데파르망Calvados department에서 가장 높은 고지인 르 몽 빵쏭Le Mont Pinçon까지 점령한다는 작전이었다.
한편 이에 맞서는 독일군은 판저레어Panzer-Lehr 기갑사단, 제21기갑사단, 제12SS기갑사단, 제101SS중전차대대로 편성된 제프 디트리히 SS상급집단지도자(SS대장) 휘하의 제1SS기갑군단, 제3대공포군단, 제47기갑군단(주 전력은 제2기갑사단이었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깔레 지역에 오랫동안 잡혀있었다.), 제352보병사단과 제716초계보병사단을 휘하에 둔 제84군단으로 이뤄져 있었다.
Operation Wild Oats
6월 6일 07시 30분, 제30군단은 골드비치 상륙에 성공한 뒤 7곳에서 약 5마일씩 내륙으로 진격하는 데 성공했지만 르 아멜Le Hamel에서 격렬한 전투에 말려들어 일몰 전에 D-데이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엔 실패했다. 수색대는 바이외 외곽에 도달, 주노 비치로 상륙했던 캐나다 제3보병사단과 접촉하는 데 성공했다. 오마하 비치에 상륙한 미군과 함께 내륙으로 진격해오던 제47왕립해군 코만도는 뽀흐 엉 베쌍Port-en-Bessin-위빵Huppain에서 3마일 떨어진 곳까지 전진했다. 오후동안 제84군단은 예비부대인 캄프그루페 마이어Meyer에 바이외 외곽에서 제50보병사단 측위를 타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도중에 빈약한 역공부대를 보강하기 위해 1개 대대를 오마하 비치 방면으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역공은 엄청난 사상자를 내며 실패했다. 6월 7일 제7기갑사단의 주력이 예정대로 상륙했고 제30군단은 바이외와 뽀흐 엉 베쌍을 포함한 남아 있던 D-Day 당일목표를 확보했다. 이날 동안 제84군단은 가용한 예비전력의 잔여인 제30여단을 발진시켜 전날에 시도했던 골드비치를 향한 역공을 시도했으나 여단은 바이외 북쪽에서 사실상 격멸되고, 역공은 실패로 돌아갔다. 두 번의 역공 실패는 미군에게 포위망 북단의 시가지로 진입할 수 있는 기회를 남겼으나 미군은 이를 인지하지 못했다.
소드Sword 비치에 상륙한 다른 부대들의 공격도 순조로이 진행되진 않았다. 제1군단 예하의 제3보병사단은 계획대로 캉을 목표로 내륙으로 공격을 시도했으나 시가에서 15km 떨어져 있던 독일군 진지들이 강력하게 버텼던 것이다. 더욱이 시 외곽에 독일 제21기갑사단이 투입되면서 제3보병사단의 노력은 점차적으로 약해지고 상륙지점의 혼잡으로 지원을 위한 기갑전력도 도착하지 못하면서 사단은 D-Day 당일 캉에 도달한다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충분한 모멘텀을 내는데엔 실패했다.
6월 9일에도 캉이 여전히 굳건하게 독일군의 손에 놓여 있자 미영 연합군 지상군을 지휘하던 몽고머리는 마일즈 뎀프시Miles Dempsey 중장과 영국 제2군과 미 제1군을 지휘하던 오마 브래들리와의 회의에서 영국 제2군에 대한 새로운 계획, 야생밀Wild Oats 작전의 실행을 결정했다. 포위기동으로 캉을 점령한다는 작전이다. 제1군단 예하의 제51보병사단과 제4기갑여단이 포위기동의 동쪽 날개가 되어 통가 작전으로 제6공수병사단이 확보한 오르느강 동안의 교두보를 발진하여 캉에서 남동쪽으로 6마일 떨어져 있는 카니Cagny를 향한 공세를 발진한다. 한편 제30군단은 서쪽 날개가 되었다.
Operation Perch가 변경되면서 몽 빵송Mont Pinçon을 향해 전진하던 제7기갑사단은 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에브리Évry에서 오동강을 도하, 마을 근처의 112고지를 향해 기동했다. 포위망을 완성시키기 위해 제1공정사단을 양군 사이에 강하시킬 것이 제안되었으나 이에 대해 연합군 공군 지휘관 트라포드 레이 말로리 원수는 목표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사단이 폭넓게 흩뿌려질 뿐 아니라 어떻게 보더라도 해당 지역의 착륙지점은 파일럿들에게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레이 말로리 원수에 대해 몽고머리의 심각한 분노에도 불구하고 포위공격은 결국 공정부대 투입없이 진행되었다. 이에 후버트 마이어Hubert Meyer는 Operation Perch는 연합 작전이었지만 Operation Wild Oats는 분리된 별개의 작전이 되어 버렸다고 평했다.